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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강론노트/윤종관 가브리엘

예수님이 마르타를 질책한 까닭-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연중 제16주일, 농민주일

2016. 7. 17. 10:00 · 하부내포성지 만수리공소

 

미움으로 얻은 깨달음

내가 하는 일,  나의 것이 아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란, 나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나 자신에게서 떠남으로써 ‘참 나’를 채우는 길입니다. 그러한 길을 가라고 깨우치는 메시지를 오늘 복음 성경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극명한 대조


귀한 손님으로 맞이한 예수님을 향하여 마르타와 마리아의 태도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마르타는 자신을 내세워 자기가 하는 일로 자신을 채우고 있습니다만, 마리아는 자신을 비우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이 두 여인의 태도 가운데 참 그리스도 제자의 모습이란 마리아와 같은 것이어야 함을 오늘 복음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 10, 41-42)

 

마르타의 좋은 점


이렇게 예수님께로부터 타이름을 듣게 된 마르타에 대해서, 성경 해설자들은 간혹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녀는 자기 처지에서 아름다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신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 혼신의 정성을 다 하는 태도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손님이나 나그네를 지극정성 맞이하는 환대(Hospitality)의 아름다운 태도를 우리는 오늘 복음서의 마르타와 제1독서(창세 18, 1-10 참조)의 아브라함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마르타는 자기 집에 오신 손님을 ‘주님’으로 극진히 모셨습니다.

 

그렇듯 아브라함과 마르타와 같이 우리도 나그네와 방문객을 ‘주님처럼’ 나의 집에 모셔드리는 태도로 대함으로써, 사랑의 환대를 할 줄 아는 참 그리스도인다운 습성을 몸에 익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마르타의 태도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하자면, 저는 우리네 한국의 좋은 인심을 예로 들고 싶습니다.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면 으레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우리네 인심입니다. 제가 사제로서 교우들의 가정을 방문하면 꼭 음식을 대접받게 됩니다. 누워계시는 환자를 위해 봉성체나 병자성사를 집전하러 가면, 그 집의 가족들은 성사집전에 마음 쓰기보다도 더 우선적으로 사제에게 다과라든가 차 한 잔이라도 먼저 내놓으려 신경 쓰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런 경우에 저는 성사집전을 하러 왔지 먹으러오지 않았다면서 퉁명스레 말하곤 했습니다. 오늘 복음 성경에서 마르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마르타는 그래서 예수님의 질책을 듣게 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마르타를 질책한 까닭


그런데 오늘 복음서에서 그렇듯 지극정성으로 주님을 모시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마르타를 예수님께서 질책하신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마르타의 정성스런 접대 노력을 탓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제가 봉성체 해드리러 방문한 교우 가정에서 음식부터 내놓는 분들을 나무라듯이 말씀하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그 질책성 타이름은 마르타의 그 정성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고 그녀가 뱉은 말 때문입니다. 시중드는 일로 경황이 없던 마르타가 예수님께 불평조의 항의를 한 것입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 40)라고 말한 것이 문제이지요.

 

마르타는 눈을 흘겨댔을지도 모른다


한번 상상해봅시다. 마르타는 그런 말씀을 드리기에 앞서서 얼마나 눈을 흘겼겠습니까? 그것도 자기 동생 마리아에게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말입니다. 아마 마리아와 예수님께 번갈아 눈을 흘겨대느라고 마르타의 눈은 상당히 째졌을 것입니다. 이런 상상을 하면서 저는 다음과 같이 저 자신을 반성해야겠습니다.


마르타가 느낀 원망감을 나도 가졌다면

 

저는 여기 하부내포 지역의 순교자들 유적을 찾아내어 성역화 하면서, 이른바 ‘성지개발작업’을 해오면서, 마르타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눈을 흘기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인근 성당의 주임신부들을 못마땅해 하여 몹시 원망하면서 말입니다. 마르타가 동생 마리아를 못마땅해 하듯이, 같은 교구의 동료사제들을 원망하여왔습니다. 제가 순교자 유적지를 찾아내어 그 관련 부지를 매입해야겠는데 자금을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구 내 본당들을 찾아가서 교우들께 성지후원회 가입을 호소하려 했습니다. 교구 내 본당신부들에게 그런 기회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하곤 했습니다만 호응해주는 사제들은 극소수입니다. 호응해주지 않는 많은 동료사제들을 저는 몹시 원망합니다. 아니, 그 사제들을 미워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사제들에게 가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어집니다.

 

“당신네 본당이 당신 개인의 본당이야? 순교자들을 기억하여 정성을 바칠 마음을 가진 교우들이 많을 터인데, 본당주임신부가 왜 가로막는 거야? 내가 하는 순교유적지성역화가 나 개인의 사업인 줄 아는 게야? 우리 교회와 모든 교우들의 일이잖아?”

 

이렇게 퍼부어대면서 저 자신의 울분을 터뜨리고 싶지만 아직까지 차마 그리 해보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동료사제들에 대한 원망스런 마음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빚을 얻어서 순교유적지의 땅을 어렵사리 확보하고 여러 가지 작업을 하면서 더욱 그 원망이 짙어갑니다. 얻은 그 빚이 이자와 더불어 불어나가듯이 동료사제들의 비협조에 대한 원망이 짙어갑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동료사제들을 만날 때 미움이 솟구친 적도 있었습니다. 성지 가꾸는 일에 돈이 없어서 일꾼을 사지 못하여 혼자 땅 파고 나무 심는 작업을 하는데, 이른바 ‘사제들의 휴일’ 월요일이라면서 찾아와 놀러가자고 꼬드기다가 거절하는 저에게 “뭐 그리 혼자 충성하느냐?”고 비아냥거리는 동료 사제를 향해서 분통을 터뜨려 욕설을 뱉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태도로 말미암아서인지, 지난 몇 해 전에 그리고 올해 5월말에 순교성인 무덤자리를 성역화 하여 주교님 모시고 축성봉헌식을 거행하면서 동료사제들을 초청하였지만 참석해준 사제들이 극소수였습니다. 이곳 하부내포 지역 내의 본당주임사제들 가운데 참석하지 않은 분들에 대해서는 더욱 미움 섞인 원망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그 미움으로 깨달음(?)을 얻은 게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나의 것이 아닌 게로구나!’

 

내가 하는 일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제가 ‘미움으로 얻은 깨달음’이란 역설적이게도 적중한 깨달음인 것 같습니다. 즉 ‘나의 것이 아닌 그 일’을 나는 해야 한다는 깨달음인 것입니다. 이 깨달음은 다시, 오늘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을 나 자신에게 하신 것인 듯, 저 자신을 향한 반성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제가 예수님의 말씀에서 잘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쉬운 말로 좀 속되게 표현하자면, “왜 다른 사람을 걸고넘어지느냐?” 하는 뜻이 예수님 말씀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나아가 “지금 너의 그 일이 너를 위해서냐?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냐?”라고 묻는 뜻도 있습니다. 마르타의 그 항의는 자기 일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불평이었습니다. 그렇게 불평하려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나 말 일이지, “주님”이라 부르고는 예수님을 자기 하는 일의 심부름꾼처럼 여기면서, 또한 딴전 펴고 있는 마리아의 꼴이 보기 싫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환담하시는 예수님까지 보기 싫어서 그런 비난을 퍼부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필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의 환대여야

 

여기서 “필요한 것”(루카 10, 42)은 자기를 방문하신 주님께 대한 진정 순수한 마음의 환대이어야지, “많은 일을 걱정하는”(루카 10, 41)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 “필요한 것”이란 “좋은 몫을 선택”하는 것입니다(루카 10, 42). 그 “좋은 몫”이란 주님의 마음을 나의 마음에 담는 일인 것입니다. 이걸 달리 표현하자면, 나의 마음에 나를 담아야 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만남의 사람)을 나의 마음에 담아야 할 처신이 곧 그리스도 제자의 ‘좋은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 ‘좋은 몫’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깨달음에로 저의 ‘미움으로 얻은 깨달음’을 전향시켜야겠습니다.

 

저의 그 ‘깨달음의 전향’을 도와주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몇 곳 본당신부들의 허락 하에 찾아가 호소하여, 우리 하부내포성지 후원에 동참해주신 교우님들이 계십니다. 그분들 가운데 지속적으로 매월 정성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저를 개인적으로 아시는 분들이 아니면서도 지속적으로 후원금을 보내주십니다. 보내주시는 그 정성의 금액이 관건은 아닙니다. 저를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그분들께서는 순교성인들을 향한 정성을 봉헌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러한 정성은 그래서 신앙의 표현입니다. 주님을 향한 그분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마치 오늘 복음 성경의 마리아처럼 오로지 주님을 향한 자세의 신앙이 그런 것이겠지요.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을 가진 교우님들


그래서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을 저는 여기 하부내포성지에 매월 보내시는 정성의 주인공 교우님들에게서 볼 수 있기에, 저의 ‘미움의 깨달음’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런 교우님들의 정성은 여기 하부내포성지의 성역화에 참여하시면서 동시에 저의 ‘미움의 깨달음’을 성화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의 깨달음’을 저의 마음에 담아야겠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

 

그리고 이어서 오늘 복음 말씀을 들으려고 일어서면서 묵상하는 말씀을 저의 마음에 담아봅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오늘의 복음 환호송 : 루카 10, 15)

 

그렇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고 그 실천을 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 행복하게 좋은 몫을 선택한 그리스도의 참 제자입니다. 우리 마음을 밭으로 삼아 당신 생명의 말씀을 뿌리시는 ‘그 주님의 발치 가까이 다가간 제자로서 마리아처럼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루카 10, 39 참조)이 진정 “좋은 몫”(루카 10, 42)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연중 제14주일부터 루카복음서 10장에서 당신의 참 제자가 되는 길을 가도록 당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3주간 째 듣고 있는데, 그것은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이면서(연중 제14주일의 말씀), 동시에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할 줄 아는 ‘착한 이웃’이 되는(연중 제15주일의 말씀) 것입니다만,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할 줄 앎으로써만 진정 열매를 맺는 제자로서의 ‘좋은 몫’을 다하리라는(오늘 연중 제16일의 말씀) 것을 오늘 주님은 강조하십니다.

 

농민 주일의 교훈


그리고 오늘 마침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농민들의 모습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은 제헌절이며 초복(初伏)입니다. 이 무더운 계절에 도시민들의 여유로운 피서휴가행렬을 바라보면서도, 그에 괘념치 않고 묵묵히 논밭에 엎드려 조물주의 섭리에 따르는 값진 땀을 흘려가며, 계절의 열매를 바라보는 농민들의 그 성실성은 그들의 ‘좋은 몫’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한여름 밤의 둥근 달을 바라볼 수 있는 음력 6월 열나흘입니다. 나의 고달픈 일로 마음이 일그러지는 삶이 아니라, 기울던 달이 채워지고, 채우고 나면 또 기울고, 그리고 또 다시 채우는 달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주장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으로 삶의 좌표를 삼는 것만이 진정 주님의 참 제자가 걸어가는 행복한 길임을 오늘 깨달아야겠습니다.


나 자신을 끊임없이 비워가며 하느님 말씀을 채워가야겠습니다! 그럼으로써 비워진 나는 ‘참 나’가 되어갈 것입니다.


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