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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강론노트/윤종관 가브리엘

강도를 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연중 제15주일
2016. 7. 10. 10:30 하부내포 서짓골 성지

 

‘참 이웃’을 만날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나 자신이 먼저 ‘착한 이웃’이어야!

 

내 목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이 세상 전체, 아니 우주 전부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내 인생입니다.

누구나 사람이라면 이렇듯 하나밖에 없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이요, 우주보다도 소중한 자기 인생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는 하나이지만, 인간들의 숫자만큼이나 수십억만의 우주의 숫자처럼, 한없이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거기에 그 한없이 귀중한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 귀중한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 ‘착한 이웃’으로서 만나는 서로의 관계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만난 건 큰 행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화로 드신 ‘착한 사마리아 사람’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큰 행운입니다. 혹시라도 내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위태로운 순간에 그런 ‘착한 이웃’을 만나게 된다면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도당한 사람을 보면서도 그냥 지나쳐간 사람들은 그 상황에서 어찌 할 수가 없는 처지라고 변명할 것입니다(루카 10, 31-32 참조). 속수무책이었다고 말하는 그 비겁한 변명 속에는 비정(非情)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수무책의 상황이란 마음을 쓰지 않은 것이지, 그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변명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을 관장하는 사람들인데, 피를 흘린 사람을 보았다든가 시체에 손을 대고서는 제물을 가까이 할 수 없다는 율법을 존중하여, 그 강도당한 사람의 피 흘리며 죽어가는 현장에 접근조차 하지 않고 지나쳐 가버린 것입니다. 율법을 내세우는 그들은 비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나쳐가던 동족과 달리

하지만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예로 드신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하여 죽어가던 사람에게는 동족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지나쳐 가던 동족과는 달리 원수지간으로 지내던 사람이 다가와 목숨을 구해줍니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본래 서로 상종하지 않는 원수지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강도당했다는 유다인을 동족인 사제나 레위인이 지나쳐갔음에도 불구하고 원수지간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이 돌보아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하는 점에 우리는 더욱 시선을 주목해야 합니다(루카 10, 33-35 참조). 그것은 곧 진정한 이웃이란 어느 관계의 사람인가 하는 점인 것입니다.


참 이웃은 누구인가

혈연이나 지연이나 국민 동족간의 사이에서가 아니라 진정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인간애의 관계가 ‘참 이웃’이라는 점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강조하십니다. 2년 전 세월호 참사의 현장에서 수백 명 국민들의 목숨이 바다 속에 잠기던 순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나라에서 그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수 없는 현실 또한 ‘참 이웃’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된 현실에서 정치적 명분 때문에 책임소재를 따져 묻지도 못한다는 것은 이 나라에서 ‘참 이웃’을 찾기 어렵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저 유다인의 사제나 레위인이 율법적 명분 때문에 지나쳤던 것처럼, 정치적 계산대로 저울질 하는 말들만 무성합니다. 희생자들의 가족들 심정은 그래서 ‘참 이웃’을 만나지 못하는 황량한 벌판에 버려진 마음일 것입니다. ‘착한 이웃’을 이 나라에서 만나지 못하고 있는 심정일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사람들이 사람으로서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이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우리 세상에서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불행하게도 세월호 참사 이후 지루한 정치적 공방에서 느끼게 됩니다.

우주보다도 더 귀중한 인간의 목숨을 살리는 데에 최우선을 두는 것이 진정 인간애일 것입니다. 사람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사이가 좋은 이웃들 간의 관계입니다. 그러한 좋은 이웃들 사이에 산다면 그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상 사람은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함께 걸어가며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참 이웃’과의 인생길이어야 진정 즐겁고 행복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 ‘참 이웃’은 멀리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희로애락을 늘 함께 하는 사이이면서 특별히 어려울 때 기꺼이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면 그게 ‘착한 이웃’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의도를 진정 알아들어야 이 이야기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의도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누가 나에게 진정으로 이웃이 되어주기를 바라기 보다는 내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말미에 예수님께서 던지시는 반문이 그 점을 곧 깨닫게 합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 36) 하는 이 반문에 어떻게 대답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그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요.


율법교사의 답변을 참고한다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경청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 사람(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루카 10, 37)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러한 대답을 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율법 교사였습니다.

그 율법 교사는 예수님을 못마땅해 생각하는 사람이었지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을 서슴없이 하시는 것을 보아온 율법 교사였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몸을 쓰는 일을 하면 아니 되는데,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낫게 하시는 일을 하시고 율법으로 단죄 받은 죄인들과 어울리기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만 영생을 얻으리라고 믿던 율법 교사는 아마도 예수님을 율법에 대하여 무식하거나 무뢰한일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분을 떠보는 질문을 던진 것이지요(루카 10, 25 참조). 그 때 예수님께서는 반문으로 응수하십니다.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예수님의 반문에 대하여 그 교활한 율법 교사는 대답합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의 요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한 대답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0, 26-28 참조). 그러자 그 실천 대상의 이웃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되묻는 그 교활한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루카 10, 29-35 참조).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시는 예수님

사랑의 실천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은 우리에게 스스로 ‘착한 이웃’이 되어 이웃에게 다가가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는 율법의 그 ‘이웃’을 예수님께서 보실 때는 내가 어려울 때 나에게 다가와 주기를 바라는 이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내가 다가가 주어야 할 ‘어려운 이웃’입니다. 그 어려운 이웃에게 다가가는 나는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루카 10, 37)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렇게 ‘착한 이웃’이 되어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37)하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늘날 자기중심의 이익과 편리주의 그리고 집단이기주의와 국가적 명분과 경쟁으로 ‘참 이웃’을 만나기 어려운 우리의 세상입니다. ‘참 이웃’이 없는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 즉 이웃사람 하나하나의 소중함이 망각되어진 이 시대를 이루는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너 자신의 몸이 소중한 것처럼 이웃사람이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아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하게 대하는 사람으로 서로 착한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진정 사랑하는 것이다.”고 예수님은 오늘 말씀하신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진정 추구하고 실천할 일은, 소중한 인간 사이에 서로 나 자신부터 먼저  ‘착한 이웃’으로 서로에게 다가가는 ‘참 이웃’의 세상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원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