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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강론노트/윤종관 가브리엘

왜 우린 자유로워져야 하는가 -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

연중 제13주일, 2016. 6. 26. 하부내포성지

윤종관 가브리엘 하부내포성지 주임신부

 

엉터리 9일기도

독하신 분,  예수님!

 


신학생 시절 에피소드


제가 신학생 시절에는 한 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맞이하게 되면 신학교에서 ‘9일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여름방학이건 겨울방학이건 간에 한 학기를 마치면서 학기말 시험을 끝내야만 방학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공부한 것에 대한 시험을 치르는 가운데 방학을 맞이하기 위한 ‘9일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가로 바치는 9일 기도


그 ‘9일기도’란 매일 저녁기도 후에 성가로 바치는 기도였습니다. 라틴어 성가였는데 “O Jesu, O Jesu, O Jesu!” 하면서 예수님을 부르는 기도로 시작되는 성가입니다. 그 라틴어 성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들어있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Nemo mittens manum suam ad aratrum, et respiciens retro, aptus est regno Dei).” 이 가사의 내용은 오늘 우리가 복음봉독으로 듣는 예수님의 말씀(루카 9, 62)입니다.

 

방학을 맞이하는 즐거움


그 지긋지긋한 학기말 시험을 치르면서도 신학생들은 이 ‘9일기도’의 성가를 부르는 가운데 방학을 맞이하는 즐거움으로 들뜨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 ‘9일기도’를 마치는 날은 시험이 끝나는 날이자 방학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9일기도’의 날자가 지나갈수록 그 성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더욱 우렁차게 높아갔습니다. 학기말 시험의 마지막 날, 즉 방학이 시작되는 날에는 이 ‘9일기도’의 성가를 마지막으로 부르면서, 오랫동안 떨어져있던 가족의 품으로 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엉터리 9일기도’를 마치게 되는 것이었지요. 이렇게 들뜬 기분으로 방학을 맞이하여 고향으로 떠나가는 신학생들에게 신학교의 지도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방학 동안에 지켜야 할 주의사항을 말씀하셨습니다.

 

방학도 신학교 생활의 연장이다


방학 동안도 신학교 생활의 연장이므로 신학교에서처럼 기도 생활을 잘 할 것이며, 본당에서 만나는 신자들 앞에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특별히 여자들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며, 부모형제와의 정을 과감히 끊지 못하면, 개학 때 신학교에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도신부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방학 준비를 하는 ‘9일기도’의 내용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노래로 외우던 것이었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는 오늘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뒤를 돌아보는 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오늘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눠야겠다고 말했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루카 9, 61 참조). 쟁기를 잡은 사람은 밭을 갈기 위해서 앞만 내다보며 나아가야 하듯이,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의 태도란 그러 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당부 말씀입니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애착을 끊지 못한 자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부모의 장례마저 포기하고 따라야 하나


그런데 어떤 사람이 먼저 집에 가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자(루카 9, 59 참조), 예수님께서는 아주 가혹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 60)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상식으로 보아 이해할 수가 없는 말씀입니다. 자식으로서 부모의 장례마저 포기하고 당신의 분부를 따르라고 하시는 예수님을 우리 인간의 정리로써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그야말로 독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저의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의 일을 회상해봅니다.

 

아버지께서 곧 돌아가실 것 같다


십년 이상이나 병석에 누워계시던 저의 아버지를 간병하시던 어머니께서 “아버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면서 저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침 주말이어서 본당에서의 주일 준비 관계로 가뵙지 못하고 있다가, 제가 정작 주일미사를 봉헌한 직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순간의 심정을 뭐라 말해야 할까요. 아버지의 최후 순간에 아들로서 옆에 있어드리지 못했다는 불효의 한이 저의 가슴에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9년 후에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신 후 9년 동안 혼자 사시던 어머니께서도 돌아가시던 순간에 추운 방에서 홀로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저의 누이동생이 어머니께 여러 번 전화했는데도 받질 않으셔서 가보니 차가운 방바닥에 시신으로 누워계시더라는 전화를 저에게 했습니다. 저는 두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택시로 달려갔습니다만, 이미 병원 영안실에 옮겨진 어머니였습니다. 한겨울에 걸린 독감으로 급성폐렴에 의해 돌아가신 것으로 진단되었답니다. 냉동고에 누워 계신 어머니의 차가운 얼굴에 저의 입술을 대고 비비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았지만 어머니는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의 심정을 글쎄요, 회상하여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예수님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이나 또는 신학생 시절 방학 때 부모형제들과 지낸 정을 끊어버리라고 하시던 지도신부님의 말씀과는 위배되는 저의 마음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부모의 장례마저 포기하고 당신을 따르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한 인간으로서의 저의 심정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이렇듯 어이없는 예수님의 독한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독한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한 이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연중 제12주일이었던 지난 주일에 봉독했어야 할 복음 내용과 연관 지어 묵상해야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성경 구절들을 읽을 때는 그 앞뒤의 연관내용(context)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에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남북통일기원미사’를 봉헌하는 까닭에 본래의 연중 제12주일의 복음을 봉독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연중 제12주일의 복음을 봉독했더라면 그 가운데 주요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준비하라


예수님을 ‘하느님의 그리스도’라고 표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루카 9, 20) 이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신 말씀과(루카 9, 23 참조) 더불어서 오늘의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레아 지방의 전도를 마무리 지으시고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여정의 행보를 제자들에게 준비시키시는 내용임을 유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굳히셨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그 행보에 대해서 오늘 복음서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 51)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부터 루카복음서는 그 후반부로 넘어갑니다. 그 후반부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여정과 그리고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후 일어난 일을 수록하는 부분입니다. 즉, 앞서 갈릴레아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제자들을 교육하신 내용의 전반부에 이어서 이제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이르는 과정을 루카복음서는 본격적으로 그 후반부 9장 51절부터 수록합니다.


나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그 후반부로 들어서는 시점에 대해서 루카복음서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하늘에 올라가실 때’란 예루살렘에서 그분이 맞이하게 될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의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정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결연한 모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결연한 태도는 오늘 우리가 읽는 그분의 말씀에서 잘 엿볼 수 있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나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 58)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얽매이신 분이 아니시기에 이 세상에 머리를 기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당신이 하늘에 오르실 날이 가까워진 때를 스스로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이는 곧 이미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신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왜 우린 자유로워져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분을 따르려 하는 사람들은 그분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러한 식의 예수님 추종을 일컬어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의 몸이 되어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오늘 서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갈라 5, 1 및 13 참조). 그러한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을 따르려면 반드시 인간의 본성적 욕망을 끊어버리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오늘 읽는 제1독서에서 우리는 그러한 결단을 보여준 엘리사의 태도를 보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부름에 응답하여 그는 집으로 돌아가 키우던 황소를 잡고 쟁기를 부수고 고기를 구웠습니다(열왕상 19, 20-21 참조). 엘리사의 그런 행동은, 다시는 과거의 인간사에 돌아가지 않고 새 출발로 하느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답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다”(갈라 5, 1)고 바오로 사도께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신” 우리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 해방 된 사람들이란, 오늘 바오로 사도가 설명한 바대로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된”(갈라 5, 16) 사람들입니다.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는’ 그 새로운 삶의 길을 먼저 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그러한 삶의 길은 곧 오늘 루카복음서가 표현하듯이 “하늘에 올라가실 때”를 깨달아 새로이 시작하는 삶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자세가 곧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할 자세인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일로 말미암아 즉, 세상의 일로 패배한 인간사에 얽매이지 말고, 하느님 나라의 삶에로 나아가는 우리의 신앙적 결단인 것입니다.


애욕을 끊어버리는 것이 신앙의 결단이다 


그러한 우리 신앙의 결단이란 세속적 욕망이나 육정에서 파생되는 인간의 모든 갈등과 집착과 애욕(愛慾)을 끊어버리고 나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욕망과 집착과 갈등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씀이 곧, 방학을 마칠 때 신학생이 부모형제와의 정을 끊어버리고 신학교에 돌아가야 한다는 비정한 충고였고, 또는 부모의 장례마저 포기하고 자유로이 당신을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말씀임을 오늘 우리는 상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비정하고 역설적인 말씀에 이어서 우리는 오늘 아주 멋있는 문학적 표현의 말씀을 예수님께로부터 듣습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다보지 마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다보지 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세상사와 인간 욕망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몸으로 결연하게 신앙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이미 양친부모 모두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처지라서, 이제 예수님처럼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면서 앞만 쳐다보고 나아갈 수 있는 처지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제가 지금 손을 대고 있는 쟁기에서 손을 떼지 말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또 앞으로만 계속 나아갈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늘에 올라갈 때’를 마주하면서 예수님의 독한(?) 말씀을 나 자신에게 스스로 늘 들려주어야겠지요!


출처. 하부내포성지 Daum 카페

http://cafe.daum.net/southnaepo/Dvt8/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