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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과피정노트

용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 마태오복음 6~10장

용서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한 자만이 남을 용서할 수 있어 



성서백주간 마태오복음 6~10장


오늘의 성서백주간 묵상은 그간 힘들었던 마음에 단비를 만난 기분이다. 오늘은 눈이 왔기때문에, 단 눈을 만났다고 할 수도 있겠다. 마태오 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산상설교라고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모아놓은 곳이다.


예수님이 일깨워주신 새로운 정신으로 살아야


그 중에서도 6장은 예수님께서 새로운 정신으로 일깨워주시는 것들이다. 무엇에 대해서?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해서 그렇다. 이 세가지는 구약에서 가장 중요했던 유다인들의 신심행위이며 신앙생활이었다. 특히 이 중에서 단식이란 다른 말로 굶주리고 어려운 이웃과의 연대를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가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바리사이는 보이기식으로 위선적인 모습을 보였기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의 율법적 수준으로 하지 말고 새로운 정신으로 하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 정신이다. 무엇보다도 히느님은 숨은 일도 보시는 분이시므로 다 갚아주실 것이란 사실을 전적으로 믿으라는 것이다. 


최고의 자선은 시신을 거두는 것


그러면 자선이란 무엇일까? 자선이란 유다인에게 매우 중요한 것인데. 그들이 죄를 탕감받기 위해서도 자선행위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잠깐, 구약성경 46권 중에서 자선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성경이 있다. 바로 [토빗기]이다. 시신을 거두는 이야기를 다루는데,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자선이기 때문이다. 성당마다 '연령회'라는 봉사조직이 그런 셈이다.


구약에서 자선을 베풀라는 것이 율법적으로 부과되었던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정의를 내리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시각은 모두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눈높이를 맞춘 자선행위를 강조한 것이다. 시혜나 우월한 베품이 아니란 말이다. 


개를 훔치는 가장 완벽한 방법, 개훔방


상영관을 잡지 못해 별로 많은 관객을 동원하지는 못했지만, 왼벽한 스토리와 깊은 울림을 가졌던 우리나라 영화, '개를 훔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란 영화가 있다. 일명 '개훔방'이라고 한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가정을 떠나버리고, 엄마는 아이 둘과 배달을 다니던 미니밴 차량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이곳 저곳에서 살아간다. 그 차량에서 살아가는 맏딸 초등학생 주인공은 "집이 없는 설움을 아는가?"를 간혹 묻는다. 누가 집이 없는 설움을 알 것인가? 어린아이의 서러움을 알 수 있는 이는 집이 없어서 불편한 주거생활을 겪어본 이들일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부과한 가장 큰 의무는 그들의 경험대로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집이 없는 설움을 이해할 수 있는 처지에 서는 것이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참고]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쪽박 날수도

             요한의세상노트 2015.02.22 02:00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기도를 한답시고 남들 앞에서 뽐내는 기도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뽐내는 기도란 다른 말로 하면 빈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것의 반대는 진심어린 기도이다. 진심이란 다른 이는 몰라도 하느님만큼은 알고 계시는 것이다. 


'개훔방'에서 주인공 아이는 멋진 집에서 시는 척을 하고, 실제로 멋진 집에 실고 싶어 동네 복덕방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어느날 주인공은 부자친구에게 자신의 사는 집, 아니 미니밴의 실체를 들켜버린다. 끊임없는 거짓말이 모두 들켜버리자 아이는 결국 울음보를 터트리지만, 부자친구는 모든 것을 덮어주고, 오히려 더 결속이 강한 친구로 지내고 싶어하길 간청한다. 오히려 간청하는 그 마음 안에 가난한 아이의 마음으로 내려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엄청난 우정의 이야기인 것이다.


하느님은 이미 나의 전부를 알고 계신다


진실한 기도를 위해서 예수님은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골방이란 무엇일까? 정말로 완전하게 궁벽한 곳에 자리한 골방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골방이 가진 의미는 남을 의식하지 말고 오로지 하느님을 향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면


나이를 60을 넘기고 평소와 다르게 화를 자주 내는 분들이 간혹 발견된다. 평소보다 과격해지고, 때로는 물건을 집어던지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어쩌면 치매 증상이 시작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 초기진단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 세상 안에는 화를 가라앉히는 여러가지 방식이 있디. 명상, 단전호흡, 요가 등이 그런 사례이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강력하게 요청되는 방식은 성체조배이디. 우리 성당은 오전 7시30분 경부터 오후 10시경까지 늘 성전의 문을 개방하고 있디. 얼마나 좋은가? 늘 오며 가며 성전에 와서 예수님을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늘 열려있는 성전 안에서 주님이 닐 기다리고 계신다. 치매에 걸리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렇게 성체조배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이 맑아져가는 게 바로 신앙적 방식이다. 우린 이런 방식으로 골빙에서의 기도를 조금씩 해나가야 하겠다. 


성경공부는 예수님을 만나는 실천이다


성경공부를 한다는 건 지식을 쌓아나가는 게 아니다. 성경공부는 그분이야말로 우리를 저버릴 수 없는 분이란 믿음을 토대로 하는 기도이며 신앙의 행위다. 참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이 때 우린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주신 가장 완벽한 기도를 만나게 된다. 바로 주님의 기도이다.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주로 어부들, 그다지 배움이 없는 이들을 제자로 선택하셨다. 그런 까닭으로 주님의 기도는 당시에 아주 쉬운 말로 가르쳐주신 것일 게다. 


주님의 기도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그리고 먼저 그 전반부는 세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①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②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③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먼저 우리의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는 기도여야 한다. 아버지를 거룩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도 거룩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를 거룩하게 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내가 잘 나서 나는 거룩한 것일까? 나를 거룩하게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목적이다. 당신의 이름을 빛나게 하시려고 인간을 거룩하게 하려는 계획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인 나를 성화(聖化)시켜서 하느님을 거룩하게 드러내는 도구로 내가 쓰여지는 것이다. 


두번째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는 기도를 바쳐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 바로 제자들의 삶이다. 


나는 거룩함의 도구다


세번째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구약의 하느님께서 성조 아브라함을 부른 까닭은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구약은 구원의 역사, 구원사이다. 하느님이 날 불렀을 때 그 목적은 바로 날 구원시키려는 것이다. 내가 구원되는 것은 땅에서도 하느님의 나라가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를 '도구'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제 '주님의 기도'의 후반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②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③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일용할 양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두 가지의 뜻을 담고 있다. 첫번째는 매일 먹는 우리의 실제 양식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종말의 때에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천상의 양식을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매일 먹는 양식과 종말에 먹는 천상의 양식 이 두가지가 다 해당되는 표현이 '지금 여기'란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이다. 우리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탐욕을 피하고 탐욕을 버리면, 다른 이들의 굶주림이 보인다. 


서울 대교구의 유경촌 보좌주교는 그의 저서 『21세기 신앙인에게』에서 십계명 중 7계명인 '도둑질을 하지 마라'는 계명을 풀이하면서 '내가 탐욕으로 음식을 남긴 것은 도둑질 한 것'이란 언급을 한 바 있다. 내가 과도하게 먹거나 버리는 낭비가 착취와 착복과 다를 게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한쪽에서는 배불리 먹고 있어도 다른 한쪽에서는 굶주림에 죽어가는 이들이 이 지구상에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용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후반부의 두번째는 '용서'에 대한 것이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오로지 하느님만이 갖고 계신 것이다. 특히 성경에서 죄의 용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근거한 것이며 그것은 또한 구원의 표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용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날마다 베풀어주시는 용서를 마음깊이 체험할 때 가능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날마다 나의 죄를 용서해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내가 알아들을 때 나는 이웃에게 용서를 베풀 수가 있다. 그래서 내가 하느님을 만나면 만날 수록 우리는 남을 용서할 힘도 얻게되는 것이다. 


눈만 뜨면, 세상은 온갖 유혹이다


주기도문 후반부의 세번째는 '유혹'에 대한 것이다. 우리 세상은 눈만 뜨면 유혹이다. 그 유혹을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유혹을 이기는 힘을 주님께 청하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유혹이 내 앞에 섰을 때 유혹을 버리고 하느님을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유혹은 곧 사탄이고, 유혹의 중심에는 사탄이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유혹을 이기는 힘은 하느님 밖에 없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의혹이 내 마음 속에서 자란다. 그 작은 의혹의 씨앗이 크게 자라났을 때 그것은 없어지지 않고, 내 몸과 마음을 힘들고 지치게 만든다. 그속에서 인간은 분심에 시달린다. 그럴 때마다 성체조배를 해야 한다. 성체조배를 하면 우리를 기다리던 예수님이 내 마음 안에 자리를 잡으시고, 그렇게 예수님이 내 마음에 앉으면 내 마음 속에서 자랄 대로 자란 의혹의 덩어리는 사라지게 된다. 


단식은 내 자신을 비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우리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서 내 속을 비우는 훈련을 해야 한다. 단 한시간 만이라도 속을 비우는 공복제(공심제)를 지키는 것도 내 마음에 예수님을 채우는 기회가 된다. 무엇보다도 단식은 마음의 가난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실천을 통해 평등한 방식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게 된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


우리는 내가 가진 보물을 내 곳간에 쌓아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보물이란 하느님 지향을 갖고 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보물이란 내가 욕망하는 것이기때문에, 내가 욕망하는 곳을 향해 내 눈길이 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진정한 보물이란 하느님을 향한 지향이다. 또한 눈은 몸의 등불이다. 내 눈이 멀면 세상이 보이지 않고, 내 영적인 눈이 멀면 내 삶 전체는 어둠에 빠진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오복음 6장을 통해 가르쳐주신 새로운 정신은 '율법'이 아니고 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으라는 것이다.


먼저 들어라


마태오복음 7장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대목이다. 남을 심판하지 말고(7,1~5),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자 말 것이며(7,6),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하며(7,7~11),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7,13~14) 그리고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고(7,15~20), 주님의 뜻을 실천 (7,21 ~22) 하는 등이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중요한 대목은 7장 12절의 황금률이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마태 7,12)


황금률이란 듣는 연습을 말한다. 나이를 먹어갈 수록 지금의 세대를 이해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 7장까지는 가르침이다. 이제 8장부터는 기적사화를 보여주고 있다. 병을 고치고 마귀를 물리치는 예수님의 권능을 보여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받아들인다(긍정)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 도래의 상징


한센병(나병)은 여전히 지금도 천형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안양의 라자로 마을은 굉장히 큰 나환자 자활촌인데, 도움의 봉사를 꺼리는 이들이 종종 있다는 말도 있다. 나병은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부정당하는 병이다. 그것은 부정한 병이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긍정한다는 것이다. 긍정은 부정의 벽을 허무는 것이다. 그런 나병환자를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신 것이다. 소외되고 버려진 이들을 함께 껴안은 권위있는 행동을 하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도래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마음 안에서 풍랑이 일렁인다면


이제  8장과 9장은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기도의 결론이 아니고 기도의 시작이다. 믿음이란 전적인 의지이다. 들어주'셨'다는 게 아니라, 들어주'실' 것이란 전적인 희망이다. 그래서 풍랑을 잠재우시는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몰아치던 호수 위의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셨던 것이다. 그것은 전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진 자야말로 그 열매로 평화를 얻는다. 그 평화는 환난의 정반대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 안에 풍랑이 일렁인다는 것은 내가 지금 평화롭지도 않고 평안하지도 않다는 뜻이다. 조선의 박해시절 어떤 환난에서도 굴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순교의 길을 걸었던 신앙 선조들에게는 '어떤 환난 속에서도 천주님께서 우릴 구원하고 구출해주실 것'이란 강력한 '순교자의 믿음'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8장에서 나병환자를 고치셨고,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셨다. 베드로의 병든 장모를 고치셨고 그 밖에도 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기적의 사화가 등장한다. 9장에서도 기적사화는 계속된다.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소외받던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셨으며,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쳤을 뿐만 아니라 눈먼 두 사람과 말 못하는 이를 고치기까지 하셨다. 그러나 인간으로 내려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확할 것이 많은 데 일꾼은 적다'(9,37)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도 하셨다. 




2015.11.26(목) 8:30~10:05pm @ 전민동성당 1층

황토마스 원장수녀님의 성서백주간 강의 [마태오복음 6장~15장]에 대한 노트정리와 묵상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