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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신학원노트/3-1 공관, 사도행전

[마태 5-7장] 산상설교는 마태오복음의 가장 큰 특징을 보여준다

제3장 마태오 복음서

4. 하늘나라의 시작


4-3 산상설교(마태오복음 5-7장)



산상설교는 마태오복음의 가장 큰 특징을 보여준다


마태오의 첫번째 설교인 산상설교는 마태오 복음의 특징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루카(6,20-49)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있지만, 마태오복음의 길이가 훨씬 길고,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설교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마태오가 이 설교에 가장 중요하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는 의미가 된다. 루카복음에서는 4,16-30에 실려있는 나자렛 회당의 설교가 예수님의 첫 말씀이다. 


마태의 첫 설교인 산상설교가 루카에서는 중간에 등장하는 평지설교


게다가 루카복음에서는 산상설교가 아니라 평지설교이다. 루카 6,20-49는 예수님께서 "평지에 서시어"(6,17) 말씀하셨지만, 마태오복음에서는 "산으로" 오르시어 "자리에 앉아... 가르치셨다."는 것도(5,1-2) 특징적이다. 여기에서는 모세가 산 위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계명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가르쳤듯이(탈출 19-24장) 예수님께서 이제 새로운 입법자, 새로운 스승으로서의 권위를 지니시고 새로운 율법을 선포하심이 드러난다.


⑴ 참 행복(5,3-12)


이 행복선언들에서 예수님은 먼저 어떤 사람들이 행복한지를 말씀하신다. 그리고 뒤를 이어 그들이 행복한 이유를 알려주신다(K. Stock). 그 가운데 먼저 행복의 이유를 본다면, 첫째와 여덟째 행복에서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을 볼 수 잇다. (5,3.10)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 것은 마태오는 하느님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으려 하는 유다인들의 관습에 따라서 '하늘 나라'라고 표현한다.


왜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늘 나라'인가


여기에서 '나라'는 하느님의 다스리심, 하느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영역을 말한다. 세상을 손 안에 쥐고 흔드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의 이런 저런 권세들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 마태오가 사용하는 표현을 빌어서 말하자면, 하느님의 '의로움', 즉 모든 이들을 구원으로 이끌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자리,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와 여덟 번째 행복만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 잇는 다른 행복선언들도 궁극적으로는 하늘나라를 약속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슬퍼하는 이들이 위로를 받고 온유한 이들이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 등은 모두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실현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이 온전히 성취될 날이 오리라는 것, 지금 겨자씨같이, 누룩같이 시작되는 그 하느님의 나라가 언젠가 그 모습을 뚜렷이 드러낼 것이며 그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가난한 이들이 그 나라를 누리게 될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이 행복한 이들인가?


그러면, 어떤 이들이 행복한 이들인가? 첫째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5,3)이다. 루카복음에서는 단지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는데(루카 6,20), 여기에서는 굳이 "마음이"(또는 "영이", "영으로")를 덧붙인 것을 생각해보면, 마태오는 구약에서부터 있어 온 가난의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의미를 좀 더 부각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물론 그 가난은 물질적 가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스스로 가진 것이 없고 달리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 특히 자기자신에게 의지할 수 없는 이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게 되기 때문이다(스바 3,12). 그렇게 본다면, 루카 6,20에 '마음으로'를 덧붙인 마태오는 그 뜻을 바꾸어 놓았다기보다 그 안에 들어있는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한 것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슬퍼하는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5,4)은 지금 이 세상이 주는 안정과 즐거움이 인간을 채워주지 못함을 겪어 알고 있는 이들이다. 달리 말하자면, 오늘의 이 세상이 아직 온전한 하늘 나라가 아님을 아는 이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인간을 그 고난에서 구원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인 '최종적 위로'를 고대하는 이들이다"(<주석성경>). 사실 슬퍼하지 않는 사람들, 곧 현세의 즐거움이 나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이들은 하늘나라가 온다 해도 거기에서 아무런 위로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온유한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5,5)이 땅을 차지하리라는 것은 70인역의 시편 37,11을 인용한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그 시편 구절의 주어가 '아나윔'으로 되어 있다. 그 본래 의미는 3절에 나온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어 단어 '온유"에 초점을 맞춰보면, 마태오 11장 29절에서 예수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신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마태 21장 5절에서도 즈카 9,9를 인용하여,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참된 행복에서 말하는 "온유한 사람"이시고, 그분께서 폭력을 사용하여 당신의 지배를 강제로 관철시키는 분이 아니라 뭅아비로 죽임을 당하시는 임금이셨듯이, 그분의 나라에서 땅을 차지하는 것은 온유한 이들이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마태오가 말하는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5,6)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다. 마태오 7장 21절을 보면,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아버지의 나라가 올 때, 곧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될 때(6,10 참조) 이들은 그 갈망이 넉넉히 채워짐을 보게 될 것이다.


자비로운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5,7)은 방금 말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과 공통점이 있다. '의로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올바른 삶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이기 때문이다(9.13; 17.) 자비는 새로운 율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마태오 복음에서 마지막 심판 때에 '의인'으로 일컬어지며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25,34)라는 말씀을 들을 이들은 바로 다른 이들에게 자비를 베푼 이들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5,8)은 사람을 더럽히는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15,19) 등을 범하지 않고 올바로 살아가는 이들을 뜻하며,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5,9)은 글자 그대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평온한 상태를 보존하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평화를 건설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의로움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


그런데 마지막으로 행복하다고 일컬어지는 이들은 "의로움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5,10)이다. 여기에 이어지는 5장 11절부터 12절에서 주목할 것은,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라는 10절의 선언이 11절에서는 '너희'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마태오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았다(10,23; 23,34 참조). 구약시대에도,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소식만을 전했던 거짓 예언자들은 환영을 받았지만, 참된 예언자들은 거부를 받았다.


의로움은 하느님 뜻의 실천이지만 그것은 모욕과 박해를 받는 과정이다


의로움, 곧 하느님 뜻을 실천하고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하늘 나라를 위하여 투신하는 것은 늘 환영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모욕과 박해를 받게 되어있다. 하늘나라는 이미 가까이 와있으면서도 아직 완전히 실현되어 있지 않기때문이다. 복음은 하늘나라가 가치기준을 선포하는데, 그 기준은 지금 이 세상의 기준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게서 행복하다고 하시는 이들은 이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이들이고, 지금 이 세상에서 그들은 가난하고 슬퍼하고 주리고 목마르게 살아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행복하다고 선포하신다. 하늘나라가,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⑵ 하늘나라의 의로움(5,17-48)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먼저 율법과 예언서들에 대한 기본 입장을 밝히신다(5,17-20). 그리고 여섯가지 예를 들어보이신다(5,21-48). 


율법은 의미가 없나?


먼저 5장 17절부터 20장까지를 읽어보면 다음 본문들에서 어떤 말이 이어질 것인지 이해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서로 상반된 두 가지 태도, 곧 율법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태도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형식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인 태도 모두에 대하여 그것이 옳지 않음을 지적한다.


율법은 종말까지 유효한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서 보수적인 사람들은 율법이 종말까지 유효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칙적으로 율법이 항구한 효력을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곧 율법에 대한 그들과 같은 태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에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여섯 가지의 예들은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이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5장 21절부터 48절까지에 담긴 이야기


5장21절부터 48절까지 예수님은, 이혼(5,31-32), 동태복수의 경우(5,38-42), 율법의 문자를 폐지하시고, 살인이나(5,21-26) 간음(5,27-30), 맹세의 경우(5,33-37) 그 율법을 더 철저히 지킬 것을 요구하시고, 이웃사랑의 계명에 이르러서는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5,43-48) 마태오복음의 다른 부분에서 예수님은 모든 게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하실 것이다(22,34-40).


갈릴래아를 두루 돌아다니신 까닭은 의로움을 요구하셨던 것



이렇게 해서, 4장 마지막에서부터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4,23), 하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에게 의로움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여섯번 반복된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당신의 권위로 새로운 율법을 선포하신다. 이웃만이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잘 드러나듯이, 하늘 나라의 요구가 구약의 수많은 계명들을 지키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요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에 근거하고, 그 하늘 나라가 이를 실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하늘나라를 받아들이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고 하느님의 눈으로, 하느님의 가치기준에 따라 모든 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모든 행동에서 하느님을 닯게 된다.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은 (5,48), 성경 전체에서 그렇듯이 여기에서도 인간에게 어떤 행동이 요구되는 것은 먼저 인간에게 하느님의 어떤 모습이 계시된 데에 뒤따르는 것임을 보여준다. 선하신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하늘나라를 위하여(5,20) 그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의 구체적 실천방법은?


이어서 6장에서는, 구약에서부터 전통적으로 중요한 선행으로 간주되어 온 기도와 자선과 단식에 대하여 각각 어떻게 이를 실천할 것인가를 알려준다. 여기에서 역시, 그 행위들 자체가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위선적인 태도로 이를 행하는 것이 비판을 받는다. 




가톨릭교리신학원 통신신학교육부 제2단계 1학년(3학년) 봄학기

가톨릭신학연구실 편찬교재 [신약1(공관복음.사도행전)]

제3장 마태오 복음서 ④ [마태 5-7장] 하늘나라의 시작(산상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