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노트/대전사회교리학교
김다울 신부의 정치공동체란 무엇인가 ②
편집장 슈렉요한
2015. 4. 8. 23:30
정치공동체란 무엇인가 ②
김다울 클레멘스 신부님. 대전교구 시장사목 전담
대전사회교리 6주차 @ 하기동성당. 2015.4.8(수) 밤 9시(2교시)
2015.4.8(수) 밤 9시55분 풍경. 강의 후반부에 한국영화 <남쪽으로 튀어>의 일부 영상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함께 나눌 수가 없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우리가 '정치'라고 말하면 그곳은 곧 '민주주의'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정치'를 생각하며 다른 정치체제, 줄여서 정체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또 그런 시대를 살아본 적도 없으며, 왕정을 살아본 경험이라거나, 로마의 공화정을 살아본 게 아니라, 이 시대 안의 정치체제, 특히 대한민국 안에서의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민주주의가 뭔지 알아야 제대로 목적에 맞게 정치가 잘 되는지 아닌지 '식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식별을 바탕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1933~)
우리가 데모스(Demos)다
민주주의의 어원은 일단 영어로 Democracy 라고 하지요. 이것은 Demos + Kratia 복합어입니다. Demos는 [민중, 시민]으로 번역되고, Kratia는 [권력 지배]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다중'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다중, 민중] 등인데 아무튼 민주주의의 어원은 민중에 의한 지배를 말합니다. 데모스는 민중, 시민이라고 번역되고, 개념적으로 데모스는 우리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 시대에 나온 것인데, 데모스는 한 구역을 의미합니다. 당시에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아테네 폴리스는 사실 계급이 있었습니다. 귀족 계급이 있었고, 전쟁에 나가서 싸움 나가는 장군, 군인계급이 있었고, 전쟁에 따른 포로인 노예가 있었습니다. 데모스는 귀족도 아니고, 전쟁에 나가서 전공을 세워 몫을 차지하는 자격이 있는 군인들이 아닌, 흔한 평민들을 말합니다.
자크 랑시에르(1940~)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철학자
몫 없는 자들의 몫
그래서 랑시에르 철학자는 데모스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몫 없는 자들의 몫이다." 민주주의는 몫없는 자들의 몫이다라고 말합니다. 권리가 없다는 겁니다. 욍정이라면 왕이 다스릴 권리를 태어나면서 얻습니다. 다스릴 권리를 출생신분으로 부여받은 겁니다. 그런데 제 아버지는 평민이고 농사꾼이라면 다스릴 몫이 없습니다. 그런 몫이 없는 자들을 데모스라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그 데모스에도 못 끼는 사람이 있는데, 노예와 여자였습니다.
노예와 여자는 인간이었나
인간이 고상한 척하고, 고결하고 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성 참정권은 몇십년 되지 않았습니다. 서구 유럽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천년전 고대 그리스 시대에 여성은 아무 것도 아니었고,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그게 당시 현실입니다. 슬픈 현실입니다.
여성참정권의 역사
1893년 뉴질랜드
1920년 미국
1928년 영국
1971년 스위스
피흘린 한 표 역사 됐다. 경향신문 2012년 12월 18일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은? KAmerican Post 2013년 8월 19일
인종차별에 대해서 서구에서 굉장히 심각히 다루는데, 법적으로도 인종차별적 발언이나 표현이 대한 제재가 유럽에서는 심합니다. 무겁습니다. 그 까닭은 그런 역사가 있기때문입니다. [미션]이란 영화는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과수 폭포수 위쪽으로 지금도 살고 있는 과라니족을 대상 예수회 신부가 선교하러 가죠. 나중에 문제가 생겨서 과라니 족들을 데리고 갑니다. 거기서 교회 관계자들이 토론을 하죠. 그 때 나온 말이 뭐였죠? 인간인가 아닌가를 두고 토론을 합니다. 사람인가 아니냐를 두고 토론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종차별은 얼굴이 하얀색, 누런색, 검은색을 차별하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인종차별이 무서운 겁니다.
롤랑 조페 감독. 엔니오 모리코네 음악의 1986년 10월 개봉작 [미션]
1750년 스페인과 포루투갈은 남미 오지에 있는 영토 문제의 합의를 본다.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신부들은 과라니족을 감화시켜 근대적인 마을로 발전시키고 교회를 세우는데 성공한다. 신부들 중에 악랄한 노예상이었던 멘도자는 가브리엘 신부의 권유로 신부가 되어 헌신적으로 개화에 힘쓰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영토 분계선에 따라 과라니족의 마을은 무신론의 포루투갈 식민지로 편입되고, 선교회를 해체하기로 한다. 불응하는 과라니족과 일부 신부들을 설득하려는 추기경이 파견되지만 결과는 포루투갈 군대와 맞서 싸우는데..제가 잠깐 브라질에 있었는데, 당시 상 파울로 신문 1면에 크게 난 이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백인들이 와서 브라질 아마존의 원주민들을 은밀히 인간사냥하는 패키지 여행 상품이 횡행했습니다. 아마존 원주민들이 도망다니는 겁니다. 그러면 아마존 강을 배타고 가면서 사냥총으로 사람을 쏴 죽이는 인간사냥 패키지 여행 상품입니다. 그게 적발당한 사건인데, 그것이 바로 인종차별입니다.
아마존 인간사냥, 장기 밀매 노려 ... 한겨레 2006년 8월 2일
그건 사람을 안 보는 겁니다. "우리랑 다르게 생겼어!"라고 생각하는 정도를 인종차별이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당시에 여성과 노예는 데모스에 못 들어갔으니까, "아 그렇구나!" 정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자는 사고파는 물건이었다는 겁니다. 이런 슬픈 현실과 이러한 사실에 우리는 감수성이 예민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으로 태어난 여성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겁니까? 민주주의란 데모스란 말. 그리고 권력이나 지배나 힘을 의미하는 크라티아라는 그리스 말이 합쳐진 겁니다.
민중에 의한 지배, 민중의 힘
그래서 민중에 의한 지배, 민중의 힘.이런 의미가 민주주의란 말의 의미이고 어원입니다. 오늘날 모든 정치학, 정치철학, 정치에 대한 담론에서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비유를 하면, 몫없는 자들이라고 했는데, 의자가 하나 있고, 힘있고 권력있는 사람이 앉을 수 있다고 보면, 민주주의는 공석인 겁니다. 혹은 의자 주인이 계속 바뀌는 것입니다. 그게 민주주의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혼란스럽습니다. 혼란스럽지 않다면 민주주의일 수 없습니다. 통치자와 피치자를 결정하는 것도 데모스고 그것에 자유롭게 복종하는 것도 데모스입니다. 한 인간의 인격 안에 지배권과 피지배권이 같이 있는 겁니다. 내가 왕일수도 있고 평민일 수도 있고, 수시로 왔다갔다 하는 게 민주주의입니다. 그리스 민주주의의 핵심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했던 아테네를 멸망시킨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없었던 것이죠.
의자는 공석이다
어느 개인에게 권력을 주지 않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라는 폴리스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등의 주요결정사항은 민회를 통해서 했습니다. 그 당시는 공동체가 작으니까 얼굴을 보고 다 한 겁니다. 광장에 모두 모여서 결정을 합니다. "자 이제 이런 것에 대해 결정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다양한 얘기가 나오고, 토론하고, 그 과정을 거쳐서 어떤 정책이 결정된 겁니다.어느누구도 권력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였고, 사실은 불행하게도 그것이 망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서 전쟁하자는 결정을 했다가 전쟁에서 지고, 나중에 스파르타가 쳐들오는 등, 거기서 망한 겁니다.
데모스가 결정하고 자유롭게 복종한다
민주주의는 데모스가 결정하고 자유롭게 복종하는겁니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뒤에 특별히 뭐가 붙습니다. 뭐죠? 민주공화국입니다. 공화국은 라틴말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 '공공의 것'을 뜻함)를 번역한 겁니다. 이건 공적인 일입니다. 민주공화국 안에서 민주주의가 더욱 명확해집니다. 즉, 민주주의는권력자를 뽑는 게 아니라 공적인 일을 할 사람을 뽑는 겁니다.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국회의원, 대통령, 국무총리 이들은 권력자가 아닙니다. 공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동의를 하고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어떤 일을 결정하는 어느정도의 권한은 있지만, 예전처럼 왕이나 대신같은 의미로 권력을 양도하는 게 아닙니다.
권력자가 아니라 공무원을 뽑은 것이다
그런데 실상 우린 "아니에요. 우린 4년이 한번씩 밖에 없어요!"라고 말씀들 하십니다. "투표가 끝나면 그 사람들이 권력자 아닌가요? 우리한테 권력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눈에 보이는 현실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건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고 한다는 건, 공적인 일을 하는 공무원을 뽑는다는 겁니다. 우리를 위해서 일하라고,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일하라고 뽑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게 어떤 의미인지를 곱씹어봐야 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교회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회칙 백주년 46항)
참된 민주주의는 단지 일련의 규범들을 형식적으로 준수한 결과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존엄, 인권 존중, 정치 생활의 목적이며 통치 기준인 공동선에 대한 투신과 같이 민주주의 발전에 영감을 주는 가치들을 확신 있게 수용한 열매이다.
나는 민주적인가?
인권종중, 공동선에 대한 투신... 이런 것들을 다 수용한 열매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하기 위해서는 사실 우리 마인드가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나는 민주적이야!라고 생각합니까? 우리 안에는 비민주적인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10% 정도의 비민주적인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자리에 도지사가 왔다고 생각하면 우린 어떻게 인사를 할까요? 아주 반갑고 공손하게 인사를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대전역에서 노숙하는 냄새 풀풀 나는 사람이 와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면, 우린 어떻게 인사할까요? 악수를 과연 할까요? 건성으로 인사를 건네지 않을까요? 우린 내 안에서 비민주적인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라고 말하지만, 내 안이나 우리나라 사회 안에서도 민주적이지 않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집안은 밖에서 대단히 민주주의적인 분이고,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도, 집에서는 가부장적이고 비민주적인 가장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딸을 둔 아버지의 모습이 이럴 수 있죠.
(아빠) "통금 10시까지! 어딜 계집애가 늦게 까지 다녀! 늦으면 머리 빡빡 깍아놓을거야!"
(딸) "아빠, 1박 2일 MT 가는 거야!"
(아빠) "MT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민주 감수성과 거창한 민주주의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사실 대단히 나는 민주적인 것 같지만, 내 개인의 삶 안에서 민주적이지 않은 모습이 순간순간 엿보입니다. 그래서 내 안의 90%는 민주적일지라도 10%는 아닐 수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창하게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기 전에, 내 삶 안에서 민주적으로 살 수 있는 감수성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첫번째는 인권에 대한 감수성입니다.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제일 거슬리는 게 있습니다. 식당에서 간혹 50~60대 여성분들 그런 분들도 계시는데, 주로 남성 손님들이 일하는 일하는 나이어린 종업원이나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바로 반말이 나갑니다.
"야! 물가져와!"
"야! 물 갖다 달라는데 왜 이렇게 안 갖다줘!"
"야! 주문한지가 언젠데!"
"야야, 빨리 움직여! 그래서 어떻게 할라고 하니?"
전혀 존중하지 않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그렇게 습관화된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생각보다 민주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민주공화국이라고 헌법에 되어 있지만, 우리 사람들 마인드에 조선시대적 사고가 숨어있습니다. 대통령은 왕이고, 장관들은 대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평민. 말 만 바뀐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린 바뀐 것 없이 그대로 평민인 겁니다.
불편한 민주주의와 편안한 상하관계
그래서 우리는은 위 아래를 따지는 게 편합니다. 그래서 첫 인사에서부터 호구조사를 합니다. 고향을 묻고, 나중에는 "나이가 어떻게 돼요?", "아이구 내가 형님이네!" 나이를 물은 다음에 서열을 정하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감수성이 수비지 않은 문화구조입니다. 그래서 감수성을 더 키워야 합니다. 그것을 예민하게 하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어떤 면에서 어려울 수 있습니다.
“교회는 민주주의를 높이 평가하는데,
이 체제는 확실히 시민들에게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중요한 권한을 부여하며,
피지배자들에게는 지배자들을 선택하거나
통제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평화적으로
대치할 가능성을 보장해 준다.”
(회칙 <백주년>46항.)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평화적으로 대치할 가능성을 보장해준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양도하거나 부여해주지 않습니다. 푸블리카, 공적인 일을 맡길 뿐입니다. 그 체제 안에서 공적인 임무를 부여할 뿐입니다. 물론 임무에 따르는 권리와 책임이 주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투표로 끝나면 민주주의는 절대로 이뤄질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들, 우리처럼 몫없는 자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사실은 이 사회에서 훨씬 더 가난하고 소외받고 고통받는 이들의 몫을 찾아주기 위해서, 또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것. 그것이 민주사회의 모습입니다.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제일 많은 게 집회와 데모인 겁니다. 집회와 데모가 없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닙니다. 어떤 사회에 집회가 없을까요? 북한이죠. 북한에서 데모하고 집회했다는 얘기가 있나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상하게 집회와 데모와 항의를 하면 빨갱이로 낙인 찍습니다. 요즘 더 그렇게 나옵니다. 그런 거 못하게 하는 게 빨갱이입니다. 북한 3대 세습하는 독재체제, 독재정권입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질적인 정치체제는 독재입니다. 거기에 데모가 있나요? 거기 집회가 있나요? 항의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없죠. 왜죠? 위험하니까! 내 안위가 위험하니까 할 수가 없습니다.
집회를 못하게 막는자가 빨갱이다
우리 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회를 막는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없어지는겁니다. 북한처럼 독재체제로 가는 겁니다. 독일에서 집회를 노동자들이 하는 데 김진숙씨가 함께 했답니다. 그래서 경찰들이 옆에 있더랍니다. 너무 거슬렸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처럼 업무방해니, 공무방해니 잡아들려고 그런가 쳐다보게 된 겁니다. 요즘 그런 거로 벌금 200-300만원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은 집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독일경찰들힌테 저리 가라고 했더니, 다가와서 "불편하십니끼? 저희는 여러분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체질적으로 불편하다고 말을 하니까, "그러면 저희가 길 건너편 저쪽에 있겠습니다. 혹시 불편하거나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요." 경찰이 그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집회를 보호해준 것입니다. 그게 민주주의입니다.
빈의자가 민주주의다
더 나아가서, 민주주의는 권력을 부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빈의자와 같습니다. 우리 인간 하나 안에 통치자인 동시에 피지배자, 통치자이며 피치자인 아주 모순적인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그것을 이해하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어떻게 하는 게 민주주의를 하는구나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흔히 말하는 대의민주주의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에 어긋나지만 우리는 대의민주주의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것 밖에 할 수 없는 겁니다. 5천만 국민이 한 군데 모일 수가 없기때문에, 투표권을 행사하는 겁니다. 그래서 대의민주주의는 고육지책입니다. 현실적으로 마땅하지 않으니 국회를 구성하고 대의민주주의를 하는겁니다.
대의민주주의는 고육지책
어찌되었든, 대의민주주의는 완전한 하나의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시스템은 아닙니다. 그래서 집회가 필요합니다. 국회의원 300명이 모든 국민을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대의민주주의니까 대변을 해야 하지만, 온 국민을 300명의 국회의원이 그 모든 것을 대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정치체제 하에서는 더더구나 그렇습니다.
대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회의원은 두 가지 역할을 갖습니다. 하나는 대리자의 역할이며, 다른 하나는 대표자의 역할입니다. 대리자는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고, 대표자는 의견을 받아서, 이런 의견일거야, 이렇게 판단하는 영역이 대표자의 성격입니다. 의견전달은 대리자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은 오늘날 대리하기 보다는 지역구를 대표하는 역할을 합니다. 국회의원이 지역에 내려외서 설문조사를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뭔가를 묻지 않습니다. 그냥 국회에서 판단합니다. 이렇게 하는 게 유익할 것이고 양심적으로 판단해서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합니다. 정당체제 안에선 정당을 대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 지역구사람들 이게 좋을 거 같아!"
"우리당 당론은 이러저러합니다."
그러면 당론에 따라 정책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대리자의 역할과 대표자의 역할들의 균형을 통해서 대의민주주의의 작동수준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 안에서는 시민들에 대해서 데모스들에 대해서는 대표자 역할을 하고, 정당에 대해서는 정당의 대리자 역할을 하기때문에, 우리나라 대의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를 해야하나요? 항의하고 집회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린 공동선을 위해 국회의원을 뽑았는데, 이들이 제대로 안하고, 작동이 안되어, "우리 시스템이 안되서 할 수 없어"라고 있는게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것을 위해서 항의하고 움직이는 게 민주주의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자기의 목소리를 낼 권한이 있고, 들어줘야 합니다. 그것이 작동될 때,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해서 민주주의가 진정 작동됩니다.
집회 없는 민주주의는 가짜이고 거짓
집회가 없는 민주주의는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선택하고 있는 대의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집회없는 민주주의는 가짜이고 거짓입니다. 그건 독재국가입니다.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 중에서 독재국가들에서 집회가 없습니다. 집회가 생기면 군대나 경찰을 통해 진압합니다. 민주주의가 아닌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모든 집회를 보장해야 하고, 모든사람의 목소리를 보장해야 합니다. 그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평가에 대해서 교회가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생명의 복음 70항)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체제’ 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도덕적’ 가치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형태의 인간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이 체제가 당연히 종속되어야할 도덕률에 얼마나 일치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의 도덕성은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들과 동원하는 수단들이 지닌 도덕성에 달려 있다.”
<생명의 복음> 70항
☞ 여기서 도덕성이란 생명 존중,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 공동선의 실현에 부합하는가의 여부이다.
민주주의는 체제 안에서 공동선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
이 말은 민주주의 체제를 갖고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체제라는 형식이 그것의 도덕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그 도덕성은 그 체제만으로 공동선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체제 안에서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계속해서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다음은 <간추린 사회교리> 62항의 내용입니다.
교회는 사회에서 결정되고 이루어지고 겪는 일들에 무관심하지 않다. 교회는 사회생활의 도덕적 특징, 곧 진정으로 인간적이고 교화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인다. 사회 ─ 그리고 이와 함께 정치, 경제, 노동, 법률, 문화 ─ 는 세속적인 지상의 실재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구원 메시지와 구원 경륜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사회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인간과 관계가 있다. 사회는 “교회가 따라 걸어야 하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길”인 인간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간추린 사회교리> 62항
교회의 관심은 인간
이것은 요한바오로 2세께서 발표하신 회칙 안에 있는 겁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하고, 복음은 이 세상에 전해져야 합니다. 그 특별한 존재인 인간들,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해서 교회는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인간과 관계된 모든 것들, 여기 나온 것처럼, 정치, 경제, 법률, 노동, 도덕, 문화, 역사까지 이런 모든 것에 교회는 무관심할 수 없고, 구체적으로 관여해야 하고 복음의 빛에 따라 예언자적인 말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복음의 빛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최근 몇년 동안 보면서 제가 조금 아쉬운 게 있습니다.
저런 얘기는 안했으면 좋겠다
많은 분들이 이해하고 계시리라고 생각되는 데, 어떤 경우에 보면, "왜 신부님이 강론에서 정치얘기를 하지?", "저런 얘기는 좀 안했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제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강론을 하면서 '경제' 얘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문화 얘기를 하면 "아니, 신부님 왜 문화 얘기를 하시죠? 복음 이야기만 하셔야지요?"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강론에서 경제나 문화 얘기를 한다고 신자분들이 뭐라고 하시는 걸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왜 복음 이야기만 하면 되지, 왜 신부님이 경제 얘기? 문회 얘기? 그런 건 없습니다, 유독 정치 얘기만 하면, "신부님 왜 그런 얘기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전 되묻습니다. 그렇게 묻는 신자분이라면 권력이나 정치와 관련하여 본인이 스스로 정치적 입장이 있기때문에 불쾌한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적 입장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있기때문에 불쾌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교회는 정치에 대해 침묵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정치에 대해 디테일한 관심과 실천을 표명한다
교회가 얼마나 이 문제에 대해서 디테일하냐면, <간추린 사회교리>에서도 잘 나오는데, 아주 디테일합니다. 엄청 다양하게 교회는 언급합니다. 노동에 대해서도 아주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휴일 등 디테일한 것들을 언급합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 잠자는 시간은 얼마나 충분해야 하나? 그리고 노동자들이 집회를 하고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들을 막으면 안되고, 기타 등등 엄청 다양하게 교회는 언급합니다. 왜요? 인간이기때문입니다. 바로 우리들!. 하느님께서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어 존엄합니다. 그 인간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겁니다. 바로 인간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교회가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정치'만 쏙 빼고 다른 것만 관심 갖는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밥 먹는 것도 정치하는 것
왜냐하면 모든것이 정치입니다. 경제, 노동, 법률, 문화 등이 모두 정치입니다. 정치를 빼놓고 경제 얘기를 할 수 있니요? 법률을 제정하는 것에 대해 정치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문화가 형성되는 것 역시 법을 제정하고, 어떤 문화를 정책적으로 키우는가 등에 대한 모든 것들. 이 사회에서 돌아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정치를 제외하고 얘기할 수 있는 건 한 개도 없습니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밥 먹는 것도 정치입니다. 그 안에도 다양한 형태의 정치가 들어 있습니다. 쌀을 생산하는 것에 대한 정책들, 쌀을 수입할 것인지 생산할 것인지, 생산한다면, 생산주체인 농민들에게 어떻게 지원하는 정책을 펼 것인지, 기타 등등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정치를 빼놓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이 사회에 단 한 개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정치를 빼놓고 인간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인간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런 까닭으로 정치참여를 계속해서 권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강의의 핵심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권력을 양도하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에게 권력이 있는 것이고, 또한 우리 모두는 그 권력에 지배 받도록 자유롭게 복종할 의무도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게 권력이 양도되는 대의민주주의 체제는 불완전합니다. 좀 더 엄밀하게 공화국이라고 할 때,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에게 모든 권력이 양도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공적인 일에 필요한 권리와 책임을 부여받은 공무원일 뿐입니다. 대통령으로서의 공적인 일, 국회의원으로서의 법을 제정하는 공적인 일, 그리고 그 일에 관련된 권리와 책임을 부여받았을 뿐입니다. 여전히 모든 권력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사회 안에서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것은 모든권력을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게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공적인 일에 필요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고 그에 따라서 하는 것이고, 그에 부족한 부분들은 집회나 그 밖의 다른 여러가지 활동들을 통해서 보완하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활동들을 통해서, 오늘날 특히 시민단체 등이 펼쳐가는 여러가지 활동들을 통해서, 부족한 민주주의 부분들을 보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민주주의가 잘 작동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공동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정치에 무관심할 수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교회입니다. 여러분들 정치에 참여하셔야 합니다. 삶의 각자 자리에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실 수 있는 것들을 찾으셔야 합니다. 어떻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가? 많은 방법들을 통해서, 집회에 참여하든, 어떤 이들과 함께 하든, 무얼 하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정치의 목적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공동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몫없는 자들,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더 가난하고 소외받고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함께 해주고, 같이 내주고,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어떤 역할을 한다면 공동선을 위해서 정치에 참여하는 겁니다. 교회는그렇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교황님 동영상 하나 보시면서 강의를 마무리합니다. .
이탈리아 교사의 질문에 교황은 빌라도처럼 손을 씻어선 안된다고 말한다. 정치에 참여하라고 말한다. 정치가 타락했다고 하는데 왜? 다른 이들의 탓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 동영상은 지난 다른 강의에서도 보여준 것이지만, 다시 보기를 원해서 보게 됨)
2015년 4월 8일(수) 하기동성당 저녁 10시경. 대전교구 시장사목을 맡으신 김다울 클레멘스 신부님의 대전사회교리학교 제13기 6주차 수업 [정치공동체] 종료. 이 강의는 필자의 기록과 발표자료를 토대로 재구성된 것이며 실제 강연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강의자의 의도와 맥락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습니다.
김다울 클레멘스 신부님(2004.2.3 사제수품. 축일 11.23)